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리터당 가격을 확인하고,
카드를 긁고, 출발한다.
그런데 만약 전 세계 주유소에서
단 하나의 카드만 받는다면?
비자도 안 된다. 마스터카드도 안 된다.
오직 한 은행이 발행한 카드.
기름을 넣으려면 그 카드를 가져야 하고,
그 카드를 얻으려면 그 은행과 거래해야 한다.
그 은행이 미국이고, 그 카드가 달러다.
석유를 통한 신용의 창출.
네로는 은화의 순도를 희석했다.
닉슨은 금 태환을 폐지했다.
방법은 달랐지만, 결과는 같았다.
돈의 가치를 담보할 수 있는 것이 사라졌다.
1971년 8월 15일,
리처드 닉슨이 금태환 정지를 선언했다.
‘금 1온스 = 35달러’ 라는 약속이 파기됐다.
달러를 들고 오면 금으로 바꿔주겠다는 보증.
미국의 이 보증을 믿고 전 세계가 달러를
기축통화로 받아들였는데, 그것이 사라졌다.
달러 가치가 폭락했고, 금값이 치솟았다.
각국 중앙은행이 달러 보유량을 줄이기 시작했다.
기축통화의 지위가 무너지면,
미국은 더 이상 세계에서 가장 싸게 빌릴 수 없다.
제국의 재정적 기반이 흔들렸다.
이 위기의 한복판에서 한 남자가 움직였다.
헨리 키신저. 닉슨의 국가안보보좌관이자 국무장관.
키신저가 주목한 것은 석유였다.
자동차도, 비행기도, 플라스틱도, 비료도
석유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 어느 나라든 석유를 사야 한다.
석유를 달러로만 살 수 있다면?
금이 아니라 석유가 달러의 새로운 담보가 된다.
1973년 10월 6일, 욤키푸르 전쟁이 터졌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했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자
OPEC 아랍 국가들이 석유를 무기로 꺼냈다.
배럴당 3달러였던 유가가
1974년 3월, 12달러로 뛰었다. 4배.
중동 전체가 화약고가 된 그때,
키신저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찾아갔다.
사우디의 사정도 절박했다.
이란. 시아파와 1,400년간의 원수.
이라크. 이스라엘. 이집트. 군사 강국들이
사우디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천문학적 석유 수입이 있었지만,
그것을 지킬 군사력은 없었다.
석유시설이 공격당하면 모든 것을 잃는다.
키신저의 제안은 단순했다.
미국이 사우디의 국방을 책임진다.
석유시설을 보호한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이 사우디의 방패가 된다.
대신 세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 석유를 달러로만 결제한다.
둘째, 석유로 번 달러로 미국 무기를 구입한다.
셋째, 남은 달러로 미국 국채를 매입한다.
사우디가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안보를 얻고, 무기를 얻고,
그리고 미국 국채라는 안전자산을 얻는다.
미국은? 달러의 수요 기반을 영구적으로 확보한다.
달러없이 석유는 없다.
석유를 원하는 국가는 달러가 있어야한다.
페트로달러.(Petrodollar)
이 단어 안에 50년간의 세계 질서가 압축되어 있다.
전 세계 국가들이 석유를 사려면 달러가 필요하다.
달러를 구하려면 미국에 무언가를 팔아야 한다.
미국은 물건을 사들이며 달러를 세계에 뿌린다.
산유국은 석유를 팔아 달러를 벌고,
그 달러로 미국 무기를 사고,
인프라를 발주하고,
나머지는 미국 국채에 넣는다.
달러가 나갔다가 돌아온다.
얼마를 찍어내든,
석유라는 필수재가 달러의 수요를 보장하고,
국채 매입이 달러의 귀환을 보장한다.
금이 하지 못한 일을 석유가 해냈다.
경제학에 ‘트리핀의 딜레마’라는 명제가 있다.
기축통화 발행국은 통화의 안정성을 위해
건전 재정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유동성을 공급하려면 적자를 내야 한다.
안정성과 유동성이 충돌한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이 모순에 무너졌다.
페트로달러 시스템은 이 딜레마를 뒤집었다.
무역적자는 약점이 아닌,
세계에 달러를 공급하는 파이프라인.
재정적자도 약점이 아니다.
국채를 발행하면 산유국이 사준다.
적자가 시스템을 유지하는 연료가 된다.
1976년 킹스턴 체제 —
변동환율제라는 이름으로 공식화된
새로운 세계 질서의 작동 원리다.
미국이 중동에서 끊임없이 군사적 존재감을
과시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라크 전쟁. 걸프전. 중동 곳곳의 미군 기지.
패권 과시가 아니다.
페트로달러 시스템의 유지 비용이다.
석유가 달러 이외의 통화로 결제되는 순간,
이 거대한 순환이 멈춘다.
달러의 진짜 담보는
포트녹스의 금괴가 아니다.
페르시아만 위의 항공모함이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위안화로 석유를 결제한다면?
그것은 금리 인상보다, 경기 침체보다,
어떤 경제 지표보다 강력한 충격이 될 것이다.
과연 미국은 위안화로 석유를 결제하는 것을
용인할 수 있을까?
[관련 글]
참고: Daniel Yergin, “The Prize: The Epic Quest for Oil, Money & Power” (1991). David E. Spiro, “The Hidden Hand of American Hegemony: Petrodollar Recycling and International Markets” (1999). IMF Archives, “Jamaica/Kingston Agreement” (1976). 이 글은 [인플레이션의 역사] 시리즈 3편입니다. ① 네로의 은화 ② 해열제를 먹었는데 열이 오른다 에서 이어집니다. 본 콘텐츠는 교육/정보 제공 목적이며,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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