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만 더 살다 죽자


눈덩이는 처음 몇 바퀴에서 거의 자라지 않는다.

언덕 꼭대기에서 굴리기 시작하면
손바닥만 한 크기가 한참을 유지된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 질량이 임계점을 넘으면,
내리막에서 눈덩이는 폭발한다.
열 바퀴 전과 비교할 수 없는 크기로.

대부분의 사람은 내리막 직전에 멈춘다.
“안 되나 보다”라고 판단한다. 눈덩이를 놓는다.


2002년, 한 남자가 가족에게 유서를 남겼다.
그리고 차를 몰아 강으로 향했다.

그 남자는 절박했다.
은행의 대출은 모두 막혔다.
명동 사채업자들 사이에서 그의 이름이 돌 정도로..
사방을 뒤졌지만, 더 이상 빌릴 곳이 없었다.
신체 포기 각서를 쓰고 빌린 돈마저 바닥이 보였다.

달려오는 덤프트럭 하나가
그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한 마디를 되뇌었다.

“보름만 더 살다 죽자.”

그 남자의 이름은 서정진.
훗날 시총 40조의 셀트리온을 만든 사람이다.
그 보름이 역사를 바꿨다.


1999년 12월,
서정진은 대우자동차를 떠났다.
대우그룹 붕괴. 45세에 실업자가 됐다.

아내에게 받은 종잣돈 5천만 원.
동료 여섯 명과 벤처를 차렸다.
경영 컨설팅. 식품 수입. 장례업…
닥치는 대로 했다. 다섯 번 실패했다.

그런데 이 다섯 번의 실패가 전제 조건이었다.
하나라도 성공했다면,
서정진은 성공한 장례 사업가로 남았을 것이다.
작은 성공이 큰 도전을 막는다.

사업 아이템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건너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싸구려 모텔.
기찻길 소음에 잠을 잘 수 없던 밤,
창밖에 거대한 건물이 보였다.
제넨텍. 세계 최초의 바이오테크 기업 중 하나.

자동차 회사 출신이었다.
의학도 약학도 생물학도 몰랐다.
도서관에 달려가 생명공학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독학 끝에 하나의 통찰에 도달했다.
2010년대 중반이면 대형 의약품 특허가 만료된다.
바이오시밀러 시장이 열린다.

연탄 배달을 하며 중학교를 다닌 사람이었다.
택시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을 졸업했다.
4.3점 만점에 4.1점.
재능보다 절실함이 더 강한 힘이라는 것을
그의 성적표가 증명한다.

2005년, 아시아 최초 미국 FDA 승인 공장 완성.
2007년 매출 635억 원.
그리고 바이오시밀러 시장이 폭발했다.

눈덩이가 내리막을 만나는 데 10년이 걸렸다.
그 10년 동안 눈덩이는
거의 자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서정진은 보름씩, 하루씩 버텼다.


지구 반대편에 비슷한 눈덩이가 있다.

워렌 버핏의 자산 중 99%는

50세 이후에 만들어졌다.
50세 시점의 자산은 현재의 0.2%.
이것은 재능의 이야기가 아니다.
복리의 마법이다.

버핏은 10살에 첫 주식을 샀다.
그로부터 40년간 쌓은 것이
전체의 1%도 되지 않는다.
나머지 99%는 그 뒤의 40년이 만들었다.

눈덩이가 내리막을 만난 것이다.

버핏은 94세에 기부 메모를 남겼다.
자녀에게 직접 재산을 상속하지 않겠다고 했다.
자신의 성공에 행운이 크게 작용했다고 인정했다.
올바른 시대에 올바른 장소에 태어난 것.
그러므로 그 행운으로 얻은 부는 사회에 돌려준다고.

서정진은 다른 언어로 비슷한 말을 했다.
태어난 환경을 핑계 대지 말 것.
나이를 핑계 대지 말 것.
45세에 5천만 원으로 시작한 사람의 말이다.

방식은 달랐다.
버핏은 시장 안에서 복리의 논리를 따랐다.
1958년에 산 오마하의 집에서 지금도 산다.
서정진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했다.
한국에 바이오시밀러 산업이 없던 시절,
그 산업을 만들었다.

전략은 달랐지만, 구조는 같다.
시간 지평 자체가 해자였다.


나도 눈덩이를 굴리고 있다.

10년째다.
한국 주식시장에서 돈의 흐름을 추적하며
나만의 도구를 만들어왔다.
아직 내리막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서정진의 10년. 버핏의 40년.
내리막이 오기 전까지 눈덩이는
자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대부분이 멈춘다.
그래서 멈추지 않는 것 자체가 전략이 된다.

눈덩이는 처음 몇 바퀴에서 거의 자라지 않는다.
그러나 멈추지 않은 눈덩이만이 내리막을 만난다.


참고: 서정진 관련 사실은 각종 언론 인터뷰 및 공개 강연, 셀트리온 공시 자료에 기반.
버핏 관련 수치는 Berkshire Hathaway 연례보고서 및 공개된 전기적 사실에 기반.

© measure-dont-predict.com

Leave a Comment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