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처럼 악을 만드는 존재 – 윌리엄 골딩『파리대왕』의 경고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영국 해군 중위 윌리엄 골딩은
로켓 발사함의 지휘관으로서
해변을 향해 포격 명령을 내렸다.
해변에서 쓰러지는 것이 적군인지 아군인지,
군인인지 민간인인지는 함포의 연기 속에서
구별할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영국의 한 학교에서
소년들을 가르치며 이렇게 썼다.
“인간은 꿀벌이 꿀을 만들 듯 악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10년 후인 1954년,
그 문장은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


『파리대왕(Lord of the Flies)』의 설정은 단순하다.
핵전쟁 중, 영국 소년들을 태운 비행기가
무인도에 추락한다. 어른은 없었다.
소년들은 스스로 사회를 만들어야 했다.
랄프가 소라고둥을 들어올렸다.
소라를 든 자만이 발언할 수 있다는 규칙.
그렇게 민주주의가 탄생했다.
불을 피우고, 오두막을 짓고,
구조 신호를 올렸다.
문명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처럼 보인였다.

하지만 또 다른 아이 잭, 잭은 사냥을 원했다.
처음에는 먹기 위해, 곧이어 죽이는 쾌감을 위해…
소년들은 얼굴에 진흙을 칠하기 시작했고,
가면 뒤에서 그들은 다른 존재가 되었다.

얼굴 화장은 개인의 소멸이고,
집단적 광기의 시작이다.
골딩은 이 장면을 전쟁터에서 보았다.
군복을 입고 헬멧을 쓴 순간,
평범한 청년들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소설의 가장 잔인한 장면은 사이먼의 죽음이었다.
사이먼은 소년들 중 유일하게 진실을 알았다.
섬에 출몰하는 ‘짐승’의 정체가
낙하산에 매달린 죽은 병사의 시체라는 것을…
어둠 속에서 진실을 알리려 달려온 사이먼을,
광란에 빠진 소년들은 짐승으로 착각하고
몰려들어 죽인다.
진실을 가져온 자가 가장 먼저 살해당한다.
역사가 반복해온 패턴이다.

파리대왕(벨제붑, Beelzebub)이
사이먼에게 말한다.
“짐승이란 바로 너희 자신이야.”
골딩이 이 소설로 뒤집으려 한 것은
19세기 R. M. 밸런타인의
『산호섬(The Coral Island)』이었다.
『산호섬』에서 영국 소년들은 무인도에서도
신사답게 행동하며 원주민을 교화한다.
대영제국의 자부심, 인간 본성에 대한 낙관,
그리고 문명의 우월감.

골딩은 그 모든 것에 “아니오”라고 답했다.
그는 말했다. “내 책은 이렇게 말하려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났고 악이 파괴되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안전한 것은 당신이 본래 친절하고
예의 바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것이 독일에서 왜 일어났는지 안다.
어느 나라에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소라고둥은 결국 산산조각 난다.
민주주의의 상징이 부서지는 순간이다.
안경은 약탈당한다.
지성의 도구가 폭력에 복무하게 되는 순간이다.
랄프는 쫓기고, 섬 전체가 불탔다.
그때 해군 장교가 나타난다.
어른, 질서, 문명의 대리인.
소년들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살인을 자행하던 아이들이,
어른 앞에서는 다시 아이가 되었다.

하지만 골딩은 그 구원을 믿지 않았다.
해군 장교 뒤에는 군함이 있고,
군함 뒤에는 또 다른 전쟁이 있으니까.

1983년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골딩의 업적은 이렇게 평가되었다.
“인간 조건의 어두운 면을 조명하면서도,
그 속에서 빛나는 인간 정신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은 작가.”
그러나 골딩 자신은 한 인터뷰에서 고백했다.
“나는 전쟁 중에 발견했다.
나 자신도 악을 행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이 소설이 70년이 넘도록 읽히는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 안의 잭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SNS의 익명 뒤에서 누군가를 몰아세울 때,
집단의 분노에 편승해 한 사람을 매장할 때,
우리는 얼굴에 진흙을 칠한 소년들과 다르지 않다.
소라고둥을 들고 “내 차례에 말하겠다”고
기다릴 수 있는 인내.
그것이 문명과 야만의 경계선이라고 골딩은 말한다.
그 경계선은 생각보다 얇다.


참고: William Golding, “Lord of the Flies” (Faber and Faber, 1954).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 (1983, NobelPrize.org). 본 콘텐츠는 교육/정보 제공 목적이며,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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