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생제가 처음 등장했을 때,
의사들은 기적을 목격했다고 생각했다.
폐렴 환자가 하룻밤 만에 열이 내렸다.
패혈증 환자가 일어나 걸었다.
페니실린 한 방이면 충분했다.
그래서 더 썼다. 감기에도 썼다.
예방 차원에서도 썼다. 가축 사료에도 넣었다.
결과는 역설이었다.
약을 많이 쓸수록 약이 듣지 않게 되었다.
세균이 내성을 가졌고,
결국 아무 약도 듣지 않는 슈퍼버그가 탄생했다.
돈도 같다.
경기가 침체되면 중앙은행이 돈을 푼다.
처음엔 잘 듣는다.
기업이 숨을 쉬고, 고용이 늘고, 주가가 오른다.
그래서 더 푼다. 더 풀수록 효과는 줄어든다.
그리고 어느 순간, 풀린 돈은 물가를 올리기 시작한다.
이 순환을 평생에 걸쳐 추적한 경제학자가 있다.
밀턴 프리드먼. 헝가리에서 건너온
유대인 이민자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시카고 대학교에서 30년을 가르쳤고,
1976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통화주의”라는 학파를 세웠고,
20세기 후반 경제정책의 방향을 바꿨다.
그의 핵심 명제는 한 줄이다.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이다.”
돈을 너무 많이 찍으면 물가가 오른다.
프리드먼은 1992년에 《화폐경제학(Money Mischief)》을 통해 이를 증명했다.
프리드먼이 파고든 첫 번째 역사는 1873년 미국.
그해, 미국 의회는 화폐주조법을 통과시켰다.
달러를 금본위제로 전환하는 법안.
겉으로는 합리적 제도 설계였다.
실상은 달랐다.
은의 화폐 기능이 폐지되었고, 가격이 떨어졌다.
서부의 은광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은으로 빚을 갚아야 했던 농민들은
더 비싸진 금 기준의 달러로 빚을 갚아야 했다.
같은 빚인데, 갚을 돈의 무게가 달라진 것이다.
화폐 제도의 변경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누군가는 반드시 이득을 보고,
누군가는 반드시 손해를 본다.
프리드먼이 지금 한국의 금리 인하 논쟁을 봤다면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금리가 내려가면 대출자는 웃고 예금자는 운다.
환율이 오르면 수출기업은 웃고 수입물가가 오른다.
모두에게 좋은 통화정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금본위제가 무너진 뒤,
세계는 불환화폐의 시대에 들어섰다.
불환화폐. 금과 교환해주겠다는 약속이 없는 돈.
정부가 “이것은 돈이다”라고 선언하면 돈이 되는…
종이 돈.
그 가치를 뒷받침하는 것은
금도, 은도, 실물도 아니다.
오직 정부에 대한 신뢰다.
프리드먼은 이 체제의 구조적 취약성을 꿰뚫었다.
정부는 돈을 찍을 수 있는 권한을 가졌고,
그 권한은 마약과 같았다.
경기가 침체되면 돈을 푼다.
풀린 돈이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면 금리를 올린다.
금리를 올리면 경기가 다시 침체된다.
다시 돈을 푼다.
끊을 수 없는 순환.
케인즈주의에 가장 격렬히 반대한 프리드먼이
케인즈의 경고만큼은 전적으로 동의했다.
“화폐를 타락시키는 것보다 기존 사회 기반을 전복하는 데 더 교묘하고 확실한 수단은 없다.”
나는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스스스로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로 이해한 것은 훨씬 나중이었다.
2020년, 코로나.
각국 중앙은행이 역사상 유례없는 돈을 풀었다.
미국만 해도 2020년 한 해에 M2 통화량이
25% 넘게 증가했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잘 됐다. 주식이 올랐다. 부동산이 올랐다.
“영끌”이라는 단어가 일상이 되었고,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고 있다고 믿었다.
나도 자산이 늘어나는 숫자를 보며 안도했다.
그런데 2022년이 되자,
같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자산 가격은 올랐는데,
생활의 무게는 더 무거워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 자산이 늘어난 게 아니었다.
돈의 가치가 줄어든 것이었다.
프리드먼이 80년 전에 경고한 그 문장.
“돈의 양이 늘어도 실질적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배웠다.
《화폐경제학》이 쓰인지 30년이 넘었다.
그 사이 세계는 2008년 금융위기 후
양적완화를 겪었고,
2020년 팬데믹에서 역사상 최대의 돈을 풀었고,
그 뒤를 인플레이션이 따라왔다.
프리드먼의 공식은 틀리지 않았다.
항생제를 남용하면 세균이 내성을 가진다.
돈을 남용하면 경제가 내성을 가진다.
처음엔 듣는다. 그래서 더 쓴다. 더 쓸수록 덜 듣는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이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이 약은
도대체 몇 번째 처방인가.
그리고 아직 듣고 있는가.
[관련 글]
참고: Milton Friedman, “Money Mischief: Episodes in Monetary History” (1992). Milton Friedman & Anna Schwartz, “A Monetary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1867–1960” (1963). John Maynard Keynes, “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 (1919). 이 글은 프리드먼의 저서를 참고하여 개인 해석과 추가 리서치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본 콘텐츠는 교육/정보 제공 목적이며,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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